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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눔

코펜하겐... 그 이후

안병옥(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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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기후변화 협상을 하이재킹 했다.” 에드 밀리밴드 영국 기후변화부 장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코펜하겐 기후회의 실패의 책임을 놓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상호 비난이 격화되고 있다. 가장 격앙된 쪽은 유럽이다. 중국이 조종하는 개도국들의 ‘벼랑 끝 전술’에 당했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유럽에서는 194개 가입국 중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효력을 갖지 못하는 유엔기후변화협약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유럽 탄소배출권시장도 위기감에 휩싸였다. 구속력 있는 감축목표 합의에 실패하면서 탄소가격이 일시적으로 곤두박질친 탓이다.


코펜하겐의 실패는 중국의 성공?

중국은 느긋한 표정이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이미 협상 마지막 날 공식적으로 협상 결과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코펜하겐 회의의 실패를 중국의 발목잡기 탓으로 몰아가는 일부 유럽 국가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과감한 감축목표 설정에 실패한 자신들의 문제를 덮기 위해 중국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코펜하겐 이후에 대비하겠다는 의도도 감지된다. 지난주 화요일 양제츠 외교부 부장은 인도 크리슈나 외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향후 기후변화 협상에서도 양국의 협력관계를 더욱 돈독히 유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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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18일 코펜하겐 COP15에서 연설하는 원자바오 중국 총리 ⓒ AFP


사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번 회의에서 잃은 게 없으니 불만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른바 ‘코펜하겐 협정'은 지구 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2℃ 추가 상승하는 것을 억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중국이 부담스러워할 이유가 없다. 구속력 없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데다 중국은 선진국의 지원을 받는 온실가스 감축사업만 유엔 사무국에 보고하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이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교토의정서를 폐기하고자 했던 선진국들의 의도가 무산된 것이다. 지금까지 기후변화 레짐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되어 왔다. 1992년 체결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과 1997년 채택된 교토의정서가 그것이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개도국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구속력 있는 감축목표를 설정하고 있지 않다. 반면 교토의정서는 37개 선진국들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평균 5.2% 낮추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코펜하겐 회의 초반 개도국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던 이른바 ‘덴마크 초안’은 교토의정서를 대체하고자 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교토의정서의 틀을 벗어나면 개도국도 어떤 형태로든 감축의무를 져야 한다. 이 초안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유출되자 회의장 곳곳에서 “교토의정서를 죽이지 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이후 개도국들의 반격은 12월 14일 아프리카연합 소속 협상단이 회의 보이콧이라는 극한 카드를 꺼내들면서 본격화되었다. “선진국들이 일으킨 기후변화의 책임을 왜 우리가 져야 하나?”라는 불만과, 일부 선진국들이 비밀협상을 벌인데 대한 배신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결국 막판에는 선진국들의 감축의무를 명시한 교토의정서와 개도국까지를 포함하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둘 다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져 중국과 개도국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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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기후회의의 실패를 경고하는 그린피스, WWF, 옥스팜 등 NGO 대표단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여전히 불씨로 남은 국제사회 검증

사실 이번 회의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부쩍 커진 중국의 영향력이다. 중국은 개도국 그룹인 G77의 ‘멘토’를 자임하면서 국제협상에서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가졌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번 회의는 G2가 벌이는 파워게임이었다”라거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이 조종하는 꼭두각시처럼 행동했다”라는 볼멘 목소리들은, 이처럼 달라진 중국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개도국이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것을 돕기 위해 단기 지원기금으로 2012년까지 3년 동안 총 300억 달러를, 이후 2020년 까지는 매년 1000억 달러를 조성한다는 것에 합의한 것은 개도국들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성과다. 원했던 액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기후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주장이 관철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매년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기금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문제다. 국제 금융거래에 0.005%의 세금을 부과하는 토빈세 도입 주장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의 외환보유고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모두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상태다. 지원 대상 국가의 범위 설정 문제도 잠복해있는 뜨거운 쟁점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최빈국과 군소도서국가들로 지원 대상을 제한해야한다는 입장인 반면, 중국은 이를 ‘개도국 분열을 노리는 술책’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앞으로도 중국이 G77 뒤에 숨어 말로만 온실가스를 줄이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 상원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검증체계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국내 기후변화법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반면 중국의 입장은 단호하다. 자국의 힘으로 추진하는 감축노력까지 검증하겠다는 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코펜하겐 회의 내내 휘발성이 가장 높은 쟁점이었다. 미국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검증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중국에서 제조된 상품에 국경세를 부과할 태세다.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10명은 오바마에게 보낸 서한에서 “상원은 경쟁국들로부터 미국의 산업을 보호할 수 없는 어떤 조약에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중국이 “주권을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국제사회의 검증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내년에도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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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정의’를 외치며 코펜하겐 도심을 행진하는 시민들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타이타닉호는 침몰할 것인가?

코펜하겐 기후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2020년까지 선진국들이 이루어야할 감축목표는 모두 괄호로 처리되었으며, 2050년까지의 장기감축목표는 아예 문구에서 삭제되었다. 내년 1월 말까지 모든 국가들이 자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유엔에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지만, 일부 개도국들의 반발을 감안하면 이마저 성공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내년 5월 말 독일 본에서 열리는 회의까지는 각국의 물밑협상과 탐색전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보다 앞서 미국 기후변화법안의 상원 통과 여부도 관심거리다. 상원의 벽을 넘는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잃어버린 협상의 주도권을 일부나마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본 회의는 협상 성패의 가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회의마저 난항을 겪는다면 12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16)의 성공도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나라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투발루 협상단 대표는 "빠르게 가라앉는 타이타닉호를 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코펜하겐에서의 실패가 뼈아픈 것은, 온실가스 감축행동이 최소 1년가량 지연되면서 기후변화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방치했다는 점이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두려운 대목이다. 내년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인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지도 모른다. 코펜하겐 회의의 실패를 과연 선진국들만의 패배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글은 2010/01/05  위클리경향 85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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