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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눈에 비친 연구소

의무감축국 지위 각오하고 전략 세워라(시사IN, 2009.8.3)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발표를 앞두고 초읽기에 들어갔다. 녹색성장위원회는 8월 초 여러 가지 감축 목표 시나리오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잠재량 분석에 착수한 것은 지난해 9월. 연구팀에는 에너지경제연구원·환경정책평가연구원·한국개발연구원 등 모두 5개 국책 연구기관이 참여했다. 연구팀이 내놓은 분석 결과는 전문가 7인으로 검토위원회를 구성해 검증과 보완 작업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와 환경단체들은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수립하자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언제까지, 얼마나’ 감축할 것인지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는 기후변화 대책은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었다. 물론 정부가 환경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감축 목표 수립에 나섰던 것은 아니다. 정부의 관심은 애초부터 국내 온실가스 감축보다는 포스트 교토체제를 둘러싼 기후변화 협상전략에 쏠려 있었다. 자발적인 감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확인시켜 우리나라의 의무 감축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이 정부가 세웠던 최상위 목표였다. 이 같은 사실은 국책 연구기관들의 보고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 보고서는 하나같이 어떤 감축 방식이 우리나라에 유리한가를 두고 저울질했을 뿐, 외국 연구기관들처럼 녹색경제로 진입하려면 과감한 감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독일 환경운동가가 베를린에 있는 화력발전소 앞에서 시위할 당시 장면.
한국의 ‘기후 무임승차’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발표가 협상 카드용이라는 지적이 맞다면, 정부가 작성한 시나리오에 과감한 감축 의지가 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정부는 유가·경제성장률·산업구조 등 경제 전망에 기초해 온실가스 배출량 전망치(BAU)를 검토했다고 알려졌다. 감축 목표는 시나리오에 따라 BAU 대비 10~15%, 많게는 20% 감축 수준에서 제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인다. 예상대로 선진국에 적용되는 총량규제 방식과 개도국이 선호하는 경제성장 연동방식 가운데서 후자를 택한 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도국형 감축 방식 제시가 국제사회에서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키가 다 자란 성인이 아동복을 사달라고 조르는 격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 15위, 온실가스 배출량이 세계 10위인 나라다. 배출량이 1990년 약 3억t에서 2006년 6억t가량으로 늘어나 증가속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빠르다. 1인당 배출량도 12t이 넘어 중국의 2.4배, 인도의 7배나 된다. 온실가스 배출에서 역사적인 책임을 뜻하는 누적배출량도 세계 20위권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우리나라 정부를 조롱하는 목소리도 거세진다. 대표적인 것이 올해 1월 말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실린 ‘예일 환경 360’ 소속 프레드 피어스의 글이다. 그는 일부 신흥공업국이 ‘기후 무임승차’를 한다며, “한국이 1996년 부자 나라 클럽인 OECD에 가입했으면서도 아직 가난한 나라 틈바구니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다”라고 비난했다.
우리나라가 개도국을 탈피해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피어스의 입에서만 나왔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해 7월 일본 도야코 G8 정상회담 당시 교도통신과 가진 회견에서 “한국은 선진국과 중진국의 중간 입장이다. 한국이 ‘좋은 모델’이 되는 목표를 제시하겠다”라고 공언한 적이 있다. 교토의정서에 따라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지고 있는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약하고 1인당 국민소득도 낮은 나라는 수두룩하다. OECD 국가 가운데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지지 않는 나라는 멕시코와 한국뿐이라는 볼멘소리는, 올해 12월 덴마크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15)를 앞두고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우리나라가 개도국으로 인정받느냐 선진국으로 재분류되느냐를 떠나 BAU 대비 감축 목표 설정은 우리나라를 영원한 ‘녹색 후진국’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사실 녹색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에 크게 처진 상태다. 2007년 127개 민간단체로 구성된 유럽기후행동 네트워크는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수준을 56개국 가운데 48위로 평가했다. 지난해 10월 삼성경제연구소가 평가한 ‘녹색 경쟁력’에서는 15개국 가운데 11위에 머물렀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중국 등 개도국을 탄소 감축에 동참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오른쪽은 ‘미·중 전략경제 대화’ 도중 왕치산 중국 부총리(왼쪽)에게 손을 뻗치는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
탄소관세 도입·무역전쟁 가능성


선진국 대다수가 적지 않은 비용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온실가스 총량규제 방식을 선택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온실가스를 과감하게 감축하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더 큰 화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는 12월 코펜하겐에서 새로운 온실가스 감축 방식 합의에 실패할 경우 탄소관세 도입과 함께 무역전쟁이 가시화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월18일자 뉴욕 타임스는 오존층 파괴물질이 함유된 제품의 수입을 제한했던 몬트리올 의정서 사례와 “적절하게 고안된다면 국경에서의 탄소관세 부여는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라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방침을 소개하면서 탄소관세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시각을 우회적으로 피력했다.  

BAU 대비 감축 목표 설정방식에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미래에 이루어지게 될 투자 수준과 기술 발전 추세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에 대해서는 기관마다 큰 편차를 보여왔다. 특히 장기 전망의 경우에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따라서 BAU 대비 감축 목표 설정 방식으로는 2020년 우리나라 온실가스 감축량이 얼마나 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가 ‘경제 주체가 감내 가능한 일정 수준의 비용’ 이하의 감축 수단만을 고려했다는 점도 문제다. 이 경우 감내할 수 있는 비용을 어떻게 계산했는지가 문제다. 산업별 또는 업종별로 온실가스 배출 한계저감비용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정 기업에는 큰 부담이 되는 감축 비용이 다른 기업에게는 가벼운 부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장의 비용 부담만이 아니다. 장기로 가야 할 방향이라면 기업은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인다. 최근 삼성전자가 향후 5년간 5조4000억원을 투자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8년 대비 50% 감축하겠다고 나선 것이 좋은 예다.

다음 달 치러질 총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높은 일본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은 최근 온실가스 배출량을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25%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현 집권당인 자민당의 아소 다로 총리가 지난 6월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8% 감축안을 내놓았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결국 온실가스 감축은 정치적 의지에 달린 문제이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