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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이슈

울리히 벡 - 세계를 실험대상으로 삼는 원자력에너지

<위험 사회> 저술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 교수가 최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태에 대해 입을 열었다. 벡 교수는 낡은 위험과 새로운 위험을 구분한 후, 일본이 왜 원자력발전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에너지를 검토해야하는 지 밝히고 있다. 다음은 지난 3월 13일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에 실린 그의 기고문이다.

 

세계를 실험대상으로 삼는 원자력에너지(Kernenergie - ein Weltexperiment)

 

울리히 벡(Ulrich Beck)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보들로 미루어보면 이번 사태와 25년 전의 체르노빌 사고와의 유사성은 우리를 매우 침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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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이고 안전문제에 관한 한 극단적으로 민감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러한 사태가 - 우리는 이 사태가 어디로 치닫을 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핵에너지에 관한 논쟁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보수 기사당(CSU)의 정치지도자) 프란츠 조제프 슈트라우스(Franz Josef Strauß)는 체르노빌 사고를 “공산주의적인 원자로 참사”라고 규정했다. 이로써 체르노빌은 매우 예외적인 사고로 치부될 수 있었다. 슈트라우스에게 체르노빌 원전은 독일에서 가동 중인 원전과는 관련이 없었다. 체르노빌은 공산주의가 불러온, 따라서 공산주의에서만 가능한 참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체르노빌 참사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이 보유하고 있는 원전의 안전성을 오히려 강조하는 사건이었다.


반면 우리는 지금 안전문제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라는 원자력산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역시 “지진에 안전” 하다고 말해 왔다. 물론 일정한 지진 강도 아래에서만 그렇다. 하지만 자연은 그런 안전규정 범위 내에 있지 않았다. 지진은 더 강력했고 원자로 두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원자력에너지는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실험이다. 원자력에너지는 세계를 실험실로 만들었다. 실험실 속의 장치들은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장치들은 모든 국가와 문화적 맥락에서 과학적, 기술적, 정치적인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대응이 이루어질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일본에서 발생한 사태는 - 프란츠 조제프 슈트라우스의 언급과 유사하게 - 일본에만 해당하는 예외적인 재앙으로 간주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지진과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을 사고의 원인으로 규명할 수 있을지라도, 세계의 다른 국가들은 더 이상 지금 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대로 원전을 운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전에 관한 지금까지의 서술(narrative)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안전의 문제는 순수한 기술적인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원자로 건설의 승인은 오로지 기술적인 전제조건들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종류의 안전철학은 완전히 무너졌다. 자연재해의 가능성은 허가절차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일본 사태에서 배운 것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사고들에 대한 준비가 매우 미흡하다는 것이다. 테러나 비행기 충돌처럼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격변들 역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계산될 수 없고 상상조차 어려운 일들이 어떻게 원전 건설의 승인절차 속에 포함 될 수 있는지는 지금 막 시작된 논쟁의 중요한 논점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위험은 우리가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볼 수 있는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다. 위험은 과학적인 수단을 통해 문화적으로 각인된 사회적 구성물이다. 원자력산업이 지닌 위험은 위험의 새로운 유형과 관련이 깊다. 이 경우에는 어떠한 실수도, 어떠한 사고도 허락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탓이다.


원자력의 안전이란 문제는 매우 상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어김없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달려있다. 만약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면, 원전 사고가 인류를 위협하는 결과를 고려할 때 원전의 정치적, 사회적 위협은 더 이상 간과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에 따라 진영이 형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원자력에너지는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 거부할 것이고, 또 다른 쪽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고수하려 들 것이다.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글로벌한 관점에서 원자력에너지의 위험만이 아니라 기후변화의 위험도 있다는 점을 내세워, 위험을 저울질한 끝에 우린 “환경친화적”인 원자력에너지를 지향하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핵폐기물 영구처리장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일본은 전적으로 원자력에너지에 매달렸었다. 일본 에너지 수요의 80%는 수입되며 20%는 원자력에너지로 충당된다. 전기수요의 삼분의 일은 원자력에너지로부터 공급되고 있다. 일본은 태양, 풍력과 같은 대안에너지와 거리를 두고 의식적으로 원자력에너지를 선택했었다. 이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리학으로부터 “어떤 대안도 시야에 두고 있지 않는 한 문제는 격하게 거부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의 선택이
가능해지면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는 보다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따라서 일본에 있어서도 이성에 기초한 위험도 평가와 함께 원자력에너지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들에 대한 고려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일본은 참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한 나라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한다(번역: 기후변화행동연구소).

http://www.fr-online.de/politik/kernenergie---ein-weltexperiment/-/1472596/8116368/-/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