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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이슈

코펜하겐의 좌절된 희망, 타이타닉호는 침몰하는가?

안병옥(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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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은 호펜하겐(Hopenhagen)이 아니라 브로큰하겐(Brokenhagen)이었다.”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세계 시민들의 희망이 좌절된 것을 빗댄 말이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2주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코펜하겐 기후회의는, 많은 이들의 실망과 좌절을 뒤로 한 채 막을 내렸다. ‘아무것도 합의하지 못한 시간낭비’라는 혹평은, 마지막 순간 ‘아무 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정치적 수사와 오버랩 되었을 뿐이다. 판 자체가 깨지는 최악의 결과는 피했다지만 후폭풍은 생각보다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먼저 협상 실패의 책임을 놓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상호 비난이 격화될 전망이다. 이는 이미 공식 폐회일인 지난 18일부터 시작됐다. 선진국들은 막판까지 2050년 장기감축목표 설정에 반대했던 중국을 껍데기뿐인 협상 결과의 희생양으로 몰아갈 태세다. 반면 개도국들은 “일부 국가들이 장막 뒤에서 비밀 협상을 벌여 민주주의 원리를 심각하게 파괴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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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센터 앞에서 선진국들은 기후부채를 지불하라고 외치는 NGO 회원들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드라마는 있었지만 정치는 없었다

‘코펜하겐 협정(accord)'으로 부르는 2페이지 반 분량의 최종 합의문 내용은 기대치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지구 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2℃ 추가 상승하는 것을 억제한다는 것과, 개도국이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것을 돕기 위해 단기 지원기금으로 2012년까지 3년간 300억 달러(연간 100억 달러), 2020년 까지 매년 1000억 달러를 조성한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국제사회의 검증시스템을 만들고 산림 전용을 막기 위한 기금 조성에 합의한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코펜하겐 협정문이 나온 것은 18일 밤 미국,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5개국 정상들의 마라톤회의를 통해서다. 이날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한 편의 숨 가쁜 드라마를 방불케 했다. 오전으로 예정된 오바마의 연설은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지속된 30개국 비공식 회의의 지지부진으로 정오를 넘겨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오바마의 연설에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렸던 것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협상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카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쥐드도이체짜이퉁>은 “세계가 마치 메시아가 오는 것처럼 오바마를 기다리고 있었다”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전날 힐러리 국무장관의 연간 1000억 달러 규모의 개도국 지원기금 합류 의사 발표에 이어 오바마의 입에서 보다 진전된 미국 온실가스 감축목표까지 나온다면 협상은 급물살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셈이다. 분석가들은 미국이 2005년 대비 17% 감축안을 21%로 상향 조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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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센터 바깥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 Olivier Morin/AFP/Getty Images


하지만 약 7분에 걸친 오바마의 연설이 끝나자 기대는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오바마의 연설 어디에도 추가 제안은커녕 미 상원을 향해 ‘기후변화법안’의 신속한 승인을 주문하는 내용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연설하기 전만 해도 유럽연합은 회심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가 좀 더 진전된 감축목표를 내놓을 경우 자신들도 1990년 대비 20% 감축목표를 30%로 상향조정해 협상을 일거에 성공시킨다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알맹이 없는 오바마의 연설은 유럽연합으로 하여금 꺼내려던 카드를 다시 집어넣게 만들었다.

사실 내용이 없기는 오바마에 앞서 연설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연설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까지 GDP 단위 기준 당 온실가스 배출량을 40~45% 감축하겠다고 발표한 내용보다 더 감축하겠다는 선언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원자바오 총리는 오바마가 중국을 겨냥해 “국제사회의 검증 없이 협상문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발언하자 회의장을 떠나 호텔로 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만 해도 협상은 완전히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준비기간까지 2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자괴감이 회의장인 벨라센터 안팎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정상들이 자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이날 오후, 막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오바마와 원자바오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이후 19일 새벽, 인도와 브라질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하는 5개국이 마라톤 회의 끝에 합의에 도달했음이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합의된 내용은 다시 한 번 세계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에 그쳤을 뿐, 합의문에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취약한 정치적 역량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살려낸 교토의정서 체제

사실 냉정하게 보면 이번 회의의 실패는 초반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회의 기간 내내 교토의정서 체제의 유지문제가 협상을 교착상태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덴마크 정부가 비밀리에 작성한 이른바 ‘덴마크 초안’은 교토의정서를 대체하고자 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교토의정서의 틀을 벗어나게 되면 개도국도 어떤 형태로든 감축의무를 져야 한다.

이 초안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유출되자 회의장 곳곳에서 “교토의정서를 죽이지 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이후 개도국들의 반격은 12월 14일 아프리카연합 소속 협상단이 회의 보이콧이라는 극한 카드를 꺼내들면서 본격화되었다. “선진국들이 싼 똥을 왜 우리가 치워야 하나?”라는 불만과 함께, 선진국들이 비밀협상을 벌인데 대한 개도국들의 배신감이 터져 나온 것이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특히 중국이 개도국 모임인 G77 뒤에 숨어 말로만 온실가스를 줄이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을 협상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 상원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검증체계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국내 기후변화법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반면 중국의 입장은 자국의 힘으로 추진하는 감축노력까지 검증하겠다는 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라는 것이었다. 또한 온실가스 배출에 있어서 역사적 책임이 가장 큰 미국이 자국의 감축 노력은 게을리 하면서 그 책임을 개도국에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과 중국을 지지하는 개도국들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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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바마 대통령과 의견을 교환하는 유럽연합 정상들 ⓒ Getty Images


사실 이 문제는 회의 기간 내내 휘발성이 가장 높은 쟁점이었다. 미국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검증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중국에서 제조된 상품에 국경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였다.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10명은 오바마에게 보낸 서한에서 “상원은 경쟁국들로부터 미국의 산업을 보호할 수 없는 어떤 조약에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미 상원에 계류 중인 기후변화법은 국경세 도입의 길을 열어둔 상태다. 결국 이 문제는 중국이 “주권을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국제사회의 검증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한 발 물러서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교토의정서를 폐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협약을 만들고자 했던 선진국들의 의도는 일단 무산된 상태다. 따라서 교토의정서 관련 선진국들의 감축의무와 미국과 중국 등 교토의정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국가들의 감축문제는 두 개의 트랙으로 나누어 다뤄지게 된다.

하지만 ‘코펜하겐 협정’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지구 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2℃ 추가 상승하는 것을 억제한다는 것과 선진국들의 과감한 감축(deep cut)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2020년까지 선진국들이 이루어야할 감축목표는 모두 괄호로 처리되었으며, 2050년까지의 장기감축목표는 아예 문구에서 삭제된 상태다. 내년 1월 말까지 모든 국가들이 자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유엔에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지만, 일부 개도국들의 반발을 감안하면 이마저 성공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코펜하겐 협정은 192개국 모두가 만장일치로 서명해야 효력이 발휘된다. 하지만 끝까지 서명하지 않는 국가는 제외할 수 있어 ‘반쪽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


코펜하겐 회의는 시간낭비였을까?

개도국이 기후변화에 대처하도록 선진국들이 기금을 마련해 제공하는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것은 코펜하겐 회의의 유일한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매년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기금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문제다. 국제 금융거래에 0.005%의 세금을 부과하는 토빈세 도입 주장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의 외환보유고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모두 광범위한 동의를 얻는데 실패한 상태다. 지원 대상 국가의 범위 설정 문제도 잠복해있는 뜨거운 쟁점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최빈국과 군소도서국가들로 지원 대상을 제한해야한다는 입장인 반면, 중국은 이를 ‘개도국 분열을 노리는 술책’으로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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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 Riddell


코펜하겐 기후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해수면 상승으로 나라가 통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투발루 협상단 대표는 "빠르게 가라앉는 타이타닉호를 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가장 뼈아프게 받아들여야할 사실은, 구체적인 행동의 지연으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가난한 나라 주민들의 삶이 기후변화로 파괴되는 것을 방치했다는 점일 것이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두려운 대목이다. 내년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인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에 도달한다는 내용조차 최종 문안에서 빠졌다는 점은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게될 것이다.

하지만 코펜하겐 회의는 시간낭비였을까? 협상 실패보다 무서운 것은 우리 모두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정치지도자들의 실패가 인류 모두의 실패일 수는 없다. 역사는 절망에 갇혀 있을수록 더욱더 나락의 심연으로 빠져들었음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절망 보다는 더욱 치열한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